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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성평등

ProP.3 “고독의 힘” 

 

고독이란 단어는 대부분 씁쓸한 기분을 들게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노력하죠. 사람들과 원만히 지내기 위해 관심없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척하고, 웃기지 않아도 종종 큰 소리로 웃고 TV예능에서 배운 리액션도 해봅니다. 하지만 그런 영혼없는 피드백을 잔뜩 하고 집에 돌아온 날엔 뭔가 씁쓸하기 마련이죠.

이런 고민은 지금 시대의 것만은 아닌듯 합니다. 20세기 초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에서 이런 답장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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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멀어져간다고 하셨는데, 그건 당신의 세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아무와도 함께 갈 수 없는 당신의 성장을 기뻐하십시오. 자연속에 있는 모든 것은 저항하고 자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독자적인 것이 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고독하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순간적으로 삐딱하게 젊은 시인이 꼰대 아냐? 란 생각도 들었지만.. 흠흠;; 다시 고독력에 집중해서.. 비단 성적 지향성만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는 퍼스널리티를, 끊임없이 훼손시켜가며 영혼없는 대화로 점철된 관계를 이어가는건 외롭지 않으려는 노력이겠죠.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대화들이 더 외로워지게 만든다는걸 알게됩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혹은 조금의 결심을 얹어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는 관계를 계발하고 맺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데요.

바로 이 순간 고독력이 진가를 드러냅니다. 타인에게 반사 혹은 투사된 자신이 아닌 자기 자신안에 온전히 웅크려있던 자기를 봄으로써 더욱 의미있는 관계를 맺을수 있는 나를 준비하게 해주니까요.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하면 인내력이나 지구력처럼 고독력을 기를 수 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나도 모르게 받아버린 여러 영향들에 대해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충분히 필터링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는게 첫번째 일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시공간을 확보해 나만의 공기청정기를 돌린달까. 특히 나쁜 자극의 경우 원망이나 분노에 취해 균형감을 잃지 않으려면 더더욱이요.

(여기서 잠깐. 나쁜 자극을 준 사람 탓은 일단 해야합니다. 오십보 백보같은, 분명 더 큰 잘못을 한 가해자를 두둔하고 죄를 경감시키는 표현은 무찔러야하고요 불끈-)

그 외도 단순하지만 오후의 고요속에서 마시는 차 한잔 같은?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 고독력을 기르려는 노력도, 연습도 쌓여갈텐데요. 그로인해 어느 날은, 오늘보다는 조금 더, 혼자라도 혹은 여럿이라도 두렵지 않은 시기가 오길 기대해봅니다.

 

P. S : BGM으로 하나 쓰윽-  <그런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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