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근진’의 뜻을 아시나요?
단순하게는 엄숙, 근엄, 진지의 줄임말인데요. 여기에 실은 조롱의 뉘앙스가 섞여있습니다. 다만, ‘맘충’이나 ‘한남’ 같은, 특정 대상을 지정해 비하하고 혐오하는 것과 달리 엄숙, 근엄, 진지라는 ‘태도’자체를 비하하는 단어라 성격이 좀 다른데요.
진지한 태도를 비웃다니 한심하고 무례하네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왜 굳이 이런 줄임말을 만들어 비웃는지를 생각해보면 조금은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얼마전 가수 비는 TV프로그램에 나와 굶주린 호랑이상을 찾고 있다는 말을 했다더군요. 아시다시피 비는 자주 자신이 극복한 가난과 근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노력했다 외에는 남들에게는 피상적인 자기경험일뿐이죠. 비가 한 노력 자체를 우습게보는게 아니라 그것의 결과와 성취외에 다른 이들에게 정말 다가갈 수 있는 경험담 혹은 프로세스냐는 다르단 얘기입니다.
굶주린 호랑이상이란 단어를 사용한 기사댓글엔 바로 이런 댓글들이 붙습니다. “쌍팔년도 소리하고 있네.” 맞는 얘깁니다. 지금 아무리 힘든 청년세대라도 70~80년대 청년만큼 가난하진 않습니다. 적어도 보리고개를 겪진 않겠죠. 즉, 지금의 40대 이상 세대가 개발도상국 출신이라면 그 밑으로는 준선진국에서 태어났으니까요.

한마디로 엄근진은 개도국적 태도인데, 농경사회를 이어받은 산업사회의 역군으로 자란 이들에겐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게 기존 질서를 읊조리고, 복기하고, 따르는게 성공의 기회를 넓혀주고 쉽게 기성사회에 편입하게 해줬습니다. 하지만 요즘 세대에겐 그 기성사회에 편입해도 본인이 받을게 별로 없는 상황이라 이것을 비웃기로 결심한거죠. (동정할거면 돈으로 줘요란 초히트어를 남긴채..)
이런 엄근진은 각종 영화나 드라마 속 연기의 세대차도 느끼게 합니다.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떠들썩했던 ‘킹덤’을 봤는데요. 의녀역할을 맡은 배두나의 연기톤이 튄다는 리뷰들을 먼저 본뒤라 어디보자..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 경우엔 연기가 튀네마네를 떠나 종합적으로 지루해지는 연기를 하는 배우는 주지훈과 류승룡이었습니다. 특히 류승룡이 그랬는데요.

류승룡이 맡은 캐릭터는 늘 보던, 바로 그, 외척세력의 수장으로, 중전은 딸이고, 인정사정 볼것없이 권력을 유지하는 사악한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이 뻔하디 뻔한 캐릭터를 뻔하디 뻔한 정통 연기로 소화합니다. 이미 너덜너덜해질만큼 익숙한 세계관이자 악역이, 예상한 대사를 예상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중얼대는데 지루해 죽는줄 알았어요.
그에 반해 의녀 역할을 맡은 배두나는 이 진부하고 식상한 세계관을 가진 극에서, 넷플릭스라는 최신식 플랫폼과 그 플랫폼에 대해 다른 기대를 갖고 지켜보는 시청자(넷플릭스는 국내 OTT 중 가장 20대 비율이 높은 서비스입니다, 무려 과반 이상) 을 염두에둔 적극적인 연기를 펼칩니다.

배두나는 조선시대 배경으로, 여성의 인권이나 역할이 애 낳는 기계 정도로 머문 극안에서(이런 여성 캐릭터 한계를 극복하는건 사실 작가가 했어야 하는데..) 어떻게든 다른 톤을 불어넣으려 했죠. 심지어 좀비를 보고 놀라는, 수동적으로 처리됐을법한 장면에서도 표정에 ‘용기’를 집어넣어 횃불을 들고 벌떡 일어서는 연기를 합니다. 하지만 그 다음 장면은 극본상 아이구 놀래라 좀비가 나왔어요라고 말하며 달려나오죠.. ㅠ-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배두나의 연기에 더 지적을 하고, 류승룡은 역시 내지는 그냥 안물안궁 정도인데요.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톤을 일관되게 혹은 씬에 맞게 조율하지 못한건 연출의 책임입니다. 배두나의 연기도 전체 밸런스를 깼다면 조정됐어야 하고요.

넘 엄숙, 근엄, 진지하게 글을 쓴것 같아 재빨리 마무리하자면.. 쿨럭;; 엄근진이 유용하게 작동하려면 그 엄근진의 실현주체라도 바꾸던가(늙다리 늘 보는 50대 중년 아재 말고 20대 여성), 세계관이라도 바꾸던가(내가 이렇게 성공했으니 너도 똑같이 하면 될거야란 나이브한 생각과 다른) 해야한단 겁니다. 둘다 올드하기 그지없는 세계관도, 태도를 보며 누가 놀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 원래 비교대상으로 ‘슈퍼걸’ 이야기도 하려고 했는데;; 일단 넘어가고, 그러다 ‘겨울왕국 시즌2’ 예고편을 보게 됐는데요. 아 이거슨 선진국의 스멜… 말해무엇 직접 보시죠. 오늘은 그저 이 예고편으로 마무리합니다.

겨울왕국 시즌2 트레일러 (제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친절하게 굴려했으나 플레이어 자체를 화면에 크게 띄우는 법을 못찾겠어요 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