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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P.6 “엄근진을 아시나요”

‘엄근진’의 뜻을 아시나요?

단순하게는 엄숙, 근엄, 진지의 줄임말인데요. 여기에 실은 조롱의 뉘앙스가 섞여있습니다. 다만, ‘맘충’이나 ‘한남’ 같은, 특정 대상을 지정해 비하하고 혐오하는 것과 달리 엄숙, 근엄, 진지라는 ‘태도’자체를 비하하는 단어라 성격이 좀 다른데요.

진지한 태도를 비웃다니 한심하고 무례하네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왜 굳이 이런 줄임말을 만들어 비웃는지를 생각해보면 조금은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얼마전 가수 비는 TV프로그램에 나와 굶주린 호랑이상을 찾고 있다는 말을 했다더군요. 아시다시피 비는 자주 자신이 극복한 가난과 근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노력했다 외에는 남들에게는 피상적인 자기경험일뿐이죠. 비가 한 노력 자체를 우습게보는게 아니라 그것의 결과와 성취외에 다른 이들에게 정말 다가갈 수 있는 경험담 혹은 프로세스냐는 다르단 얘기입니다. 

굶주린 호랑이상이란 단어를 사용한 기사댓글엔 바로 이런 댓글들이 붙습니다. “쌍팔년도 소리하고 있네.” 맞는 얘깁니다. 지금 아무리 힘든 청년세대라도 70~80년대 청년만큼 가난하진 않습니다. 적어도 보리고개를 겪진 않겠죠. 즉, 지금의 40대 이상 세대가 개발도상국 출신이라면 그 밑으로는 준선진국에서 태어났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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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비는 자연스럽게 이런 영화를 선택했고 최근 있던 프리미엄 시사에서는 4~50년전 개봉했다면 성공했을수도..라는 관람평이 등장했죠. 쿨럭;; 포스터만 봐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한마디로 엄근진은 개도국적 태도인데, 농경사회를 이어받은 산업사회의 역군으로 자란 이들에겐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게 기존 질서를 읊조리고, 복기하고, 따르는게 성공의 기회를 넓혀주고 쉽게 기성사회에 편입하게 해줬습니다. 하지만 요즘 세대에겐 그 기성사회에 편입해도 본인이 받을게 별로 없는 상황이라 이것을 비웃기로 결심한거죠. (동정할거면 돈으로 줘요란 초히트어를 남긴채..)

이런 엄근진은 각종 영화나 드라마 속 연기의 세대차도 느끼게 합니다.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떠들썩했던 ‘킹덤’을 봤는데요.  의녀역할을 맡은 배두나의 연기톤이 튄다는 리뷰들을 먼저 본뒤라 어디보자..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 경우엔 연기가 튀네마네를 떠나 종합적으로 지루해지는 연기를 하는 배우는 주지훈과 류승룡이었습니다. 특히 류승룡이 그랬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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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는 그냥 배달의 민족 광고할때랑, 예전예전에 게이로 열연하던 ‘개인의 취향’이랑 ‘별순검’ 정도 나왔을때가 리즈시절인것 같아요.

류승룡이 맡은 캐릭터는 늘 보던, 바로 그, 외척세력의 수장으로, 중전은 딸이고, 인정사정 볼것없이 권력을 유지하는 사악한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이 뻔하디 뻔한 캐릭터를 뻔하디 뻔한 정통 연기로 소화합니다. 이미 너덜너덜해질만큼 익숙한 세계관이자 악역이, 예상한 대사를 예상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중얼대는데 지루해 죽는줄 알았어요.

그에 반해 의녀 역할을 맡은 배두나는 이 진부하고 식상한 세계관을 가진 극에서, 넷플릭스라는 최신식 플랫폼과 그 플랫폼에 대해 다른 기대를 갖고 지켜보는 시청자(넷플릭스는 국내 OTT 중 가장 20대 비율이 높은 서비스입니다, 무려 과반 이상) 을 염두에둔 적극적인 연기를 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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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주체적으로, 대상과 본인이 역할이 어떤 맥락적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려 애쓰며 신식연기하시는 우리 언니

배두나는 조선시대 배경으로, 여성의 인권이나 역할이 애 낳는 기계 정도로 머문 극안에서(이런 여성 캐릭터 한계를 극복하는건 사실 작가가 했어야 하는데..) 어떻게든 다른 톤을 불어넣으려 했죠. 심지어 좀비를 보고 놀라는, 수동적으로 처리됐을법한 장면에서도 표정에 ‘용기’를 집어넣어 횃불을 들고 벌떡 일어서는 연기를 합니다. 하지만 그 다음 장면은 극본상 아이구 놀래라 좀비가 나왔어요라고 말하며 달려나오죠.. ㅠ-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배두나의 연기에 더 지적을 하고, 류승룡은 역시 내지는 그냥 안물안궁 정도인데요.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톤을 일관되게 혹은 씬에 맞게 조율하지 못한건 연출의 책임입니다. 배두나의 연기도 전체 밸런스를 깼다면 조정됐어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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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은 사람들 조율하고 일관성과 독자성을 잘 주라고 연출이 있는건데 이놈의 연출은 그저 제작비 200억으로 좀비 날뛰는거 찍는거에 빠져서는…

넘 엄숙, 근엄, 진지하게 글을 쓴것 같아 재빨리 마무리하자면.. 쿨럭;; 엄근진이 유용하게 작동하려면 그 엄근진의 실현주체라도 바꾸던가(늙다리 늘 보는 50대 중년 아재 말고 20대 여성), 세계관이라도 바꾸던가(내가 이렇게 성공했으니 너도 똑같이 하면 될거야란 나이브한 생각과 다른) 해야한단 겁니다. 둘다 올드하기 그지없는 세계관도, 태도를 보며 누가 놀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 원래  비교대상으로 ‘슈퍼걸’ 이야기도 하려고 했는데;; 일단 넘어가고, 그러다 ‘겨울왕국 시즌2’ 예고편을 보게 됐는데요. 아 이거슨 선진국의 스멜… 말해무엇 직접 보시죠.  오늘은 그저 이 예고편으로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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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 언니 저 주먹 꼭 쥔 손 좀 보시라고요, 예고편 꼭 보세요.

겨울왕국 시즌2 트레일러 (제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친절하게 굴려했으나 플레이어 자체를 화면에 크게 띄우는 법을 못찾겠어요 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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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P.5 “당신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입니까?”

-4회차까지 보고 쓴 글로, 스포일러가 포함됩니다-

 

<남자친구> vs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네, 드라마말입니다. 보고계시나요? <남자친구>는 박보검이 동화호텔 신입사원으로(a.k.a. 청포도), 유력 정치인의 딸이자 재벌가와의 이혼경력이 있는 차수현 동화호텔 대표, 송혜교와 멜로를 선보이는 드라마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현빈이 투자회사 대표로, 박신혜가 스페인 유스호스텔 주인으로 나오며 AR기반 롤 플레잉 게임을 통해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룬 드라마입니다. 여기에 게임 자동로그인 오류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기도 하는데요. 각 드라마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아래 링크들로 대신하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 <남자친구> 공식홈

제가 인상깊게 본건 드라마보다 연기력 비판 혹은 칭찬에 관한 댓글들이었습니다. <남자친구>는 박보검이 너무 평면적인 연기를 펼친단 비판을 받았고, 성인 남자가 왜 저런 말투와 행동을 하냔 댓글도 있더군요. 반면 <알함브라..>에서는 현빈이 딱 맞는(!) 캐릭터를 만났다며 칭찬을 듣고 박신혜는 왜 매번 신데렐라 역할이냐며 지겹다는 댓글이 상당수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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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포도포도합니다.우리 청포도.. ㅠ-

<남자친구>는 줄거리에서 보듯이 그동안 온갖 20대 여배우들이 했던 밝고, 순수하며 건강한 캔디 캐릭터를 박보검이 연기하는데 그 전형성으로 인해 ‘미러링’ 드라마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박보검의 이 연기논란 조차도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여배우들이, 그 빈약하고 비현실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며, 큰아버지뻘 되는 상대 남자배우에게 혀짧은 소리나, 반대로 지나치게 당당하고 맑은 목소리로 실’땅’님이나 이사님을 외쳐야했는지, 그로인해 얼마나 연기력 논란에 휘말려야 했는지를 보여주는데요. 작가가 얼마나 의도했는진 모르겠지만 이 간단한 스위치만으로도 <남자친구>는 매우 전복적인 텍스트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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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싸대기를 맞으면서도 저 웃는것 좀 보세요.

하지만 <알함브라..>속 유진우 대표, 현빈에겐 칭찬이 쏟아집니다. 딱 맞는 역할을 맡았다고. 대체 현빈에게 ‘딱 맞는 역할’이란 뭘까요?

투자회사 대표로 자기욕망에 충실한채, 그 욕망이 일으키는 온갖 소동속을 헤쳐나가는, 각종 설정을 충분히 부여받아 그에 맞게 소리도 지르고, 안타까움도 내비추고 멋진 액션까지 해내는.. 현빈은 이런 맥락하에 역시 현빈이란 칭찬을 듣습니다. 하지만 여주인공을 맡은 박신혜는 드라마틱한 설정이라 할만한게 없는 일상 속에서 코미디와, 멜로 연기를 모두 디테일하고도 안정적으로 보여주지만 칭찬은 예쁘다 정도가다입니다.

이 영민하고 담백해보이는 배우에겐 매번 신데렐라 역할이냐며 지겹다는 댓글이 달리지만 왜 100조짜리 사업을 눈앞에 두고 강렬히 욕망하는 것과 동시에 이것을 잃을까 우울하기까지한 사업가같은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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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지? 정장입고 이렇게 칼싸움까지 하니까?

이어서 <알함브라..>에서 현빈은 자기 욕망만 집요하게 추구하며, 상대를 속이거나, 불법행위도 서슴치 않는 냉정한 투자회사 대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3회가 끝나자 현빈이 그의 엑스와이프와 그녀가 가진 아이를 위해 죽은(심지어 자기때문에 죽은) 엑스와이프의 현재 남편인 차대표를 구하기 위해 게임속으로 들어갈거란 댓글을 달더군요.

대체 현빈의 어떤 캐릭터적 면모가 갑자기 그런 구원자나 정의로운 역할을 수행할거란 기대를 갖게 하는지 신기했습니다. 냉혹하고 이기적인 남성캐릭터는 어떻게 사람들에게 실은 현실적이고, 능력있고, 자기가 후려치고 있는 여자주인공에게 나중에 나 싫어할까봐 걱정된단 멘트를 날리는 로맨티스트로까지 자리매김할 수 있는걸까. 대체 같은 드라마를 보고 있는게 맞는지 의구심이들더군요. (알고보면 내 눈에도 스마트렌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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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껏 이기적으로 굴어도 사람들은 날 멋지게 보지. 훗-

사실 <알함브라..>의 송재정 작가는 이전에도 ‘남캐몰빵’이란 전문용어(?)를 던질 수밖에 없는 드라마들을 써왔습니다. <나인>, <인형왕후의 남자>, <삼총사>, <W> 그리고 <알함브라..>까지. 가장 최근작인<W>는 후반부에서 한효주가 분한 여주인공을 왜 수동적이고 하는 역할 없이 밍기적거리게 하다 결국 주연이라고 하기 어려운 분량과 함께 묻어버리다시피 하죠. 그리고 <알함브라..>에서도 적어도 4회까지는 박신혜도 한효주와 큰 차이가 없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게임속 캐릭터인 엠마로서,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줄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진 미모의 악사로 현빈의 마음을 뺐는 캐릭터란것 외엔 정체성과 역할이 제한되어있습니다.

박신혜
가난하지만 순수한 영혼이라면 오토바이를 타줘야..

이렇게 소재와 스토리로는 신선한 <알함브라..>지만 볼수록 점점 이 드라마가 가진 젠더적 지향과 표현, 역할상 한계로 인해 답답하단 기분을 느끼곤 합니다. 그에 비해 <남자친구>는 청포도가 감당이 안될때도 있지만(마치 어린시절 <전설의 고향> 볼때처럼 애인 어깨뒤로 숨습니다) 젠더 미러링이란게 이렇게 간단히 전복적 텍스트로, 사회성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여하튼 앞으로 두 드라마에서 어떤 구조나 스토리, 캐릭터를 보여줄지 모르겠지만 아주 단순하고도 쉽게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선사할수 있는 장치가 ‘젠더 역전’이란 것은 알겠더군요. 제가 아는걸 작가님들이 모를리 없을테니 그저 더 많은 드라마 작가들과 다른 창작자분들이 아는 바를 실현해주시길 바랄뿐입니다. (왠지 너무 어렵다면 일단 남자배우라고 생각하고 쓰시고 다 쓴뒤 그 캐릭터 성별을 여자로만 바꾸시면됩니다. 참 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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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입니다. 원래 하던대로 쓰고 남녀 성별만 바꾸면 됩니다!

그래서 그 새롭다는 칭찬 일색이던 <W>에서 여주인공이 모든 세계관과 사건을 촉발시키는 웹툰 작가의’딸’로 등장하고, <알함브라..>에선 이 게임을 만들고 사건을 촉발시킨 프로그래머의 ‘누나’고 ‘보호자’라 얼떨결에 불로소득으로, 모든 키를 쥐게 된다는 설정류가 더 이상 당연한듯 등장하지 않았음합니다. 더불어 이런 캐릭터들의 등장과 젠더적 활용을 통해 새롭다는 표현 안에 구조나 스토리가 아닌 캐릭터 ‘젠더’도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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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재벌 만나는 역할 했으면 이제 재벌역할 해도 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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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P.4 “논바이너리입니다만..” “네..?”

 

에즈라 밀러는 우리나라에서 “신비한 동물사전”과 “플래쉬맨”, “케빈에 대하여”로 알려진 배우인데요. (우리 멋진 원더우먼 언니가 나오는 “저스티스 리그”에도 등장하지만 폭망을…ㅠ-  다 벤 에플렉 때문이야..) 오늘 이 배우가 “신비한 동물사전”에 함께 출연한 수현과 함께 한국에 나타나 하루종일 어머 왠일이야 댓글을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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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아들 매덕스의 연세대 수시전형(!) 조사를 위해 한국에 왔다는 소문이 돌았던 안젤리나 졸리만큼은 아니었지만 최근 행적이 이슈가 된적 있어 꽤 주목을 받았는데요. 바로  “신비한 동물사전”의 수현과 함께 한 인종차별 인터뷰에 적극 대응하는 모습으로 한국에서 이슈가 됐죠. 하지만 해외에선 최근 자신을 논바이너리로 칭해서 화제가 됐었습니다. The Hollywood Reporter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건데요.

Miller has long identified as queer. “Yeah, absolutely. Which is to say, I don’t identify. Like, fuck that,” he says. “Queer just means no, I don’t do that. I don’t identify as a man. I don’t identify as a woman. I barely identify as a human.” (원문은 여기)

그리곤 보란듯이 최근 플레이보이지에서 이런 훈훈한 화보를… (화보 전체는 여기, 내 평생 플레이보이지 링크를 걸게 될줄이야..)

 

“논바이너리,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인 성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한다.”라고 사전엔 나와있네요. 분명한 성별 기반으로 기존 동성과 이성 모두에게 성애를 느끼는 바이 섹슈얼과는 확실히 다른 정체성인데요. 섹스가 아닌 젠더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대에, 굳이 헤테로들 입장에서 보자면 호모섹슈얼이란 성애적 정체성만을 담보하는 표현보단 덜 부담스러운, 하지만 이해하기엔 더 어려운 단어일듯 합니다. 사분면정도로만 보였던 정체성의 종류가 실은 스펙트럼처럼 점점 펼쳐지는 양상을 화학기호 외우듯이 외워야 한다는것도 쉽지 않을수 있고요.

더불어 에즈라 밀러의 논바이너리 커밍아웃에 대해 당당하다란 표현을 하는 국내기사를 보며 이 당당함을 인정하는 태도의 기저엔 여전히 이성교제의 가능성이 남아있다는데에 대한 안도감을 포함한것 같단 의심도 듭니다. 예를 들어 “보헤미안 랩소디”의 프레디 머큐리를 반드시 바이라고 불러야만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나 게이라고 하면 대단한 인격모독이라도 한듯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에게 마치 ‘졸혼’같은 단어로 작동한달까. (자매품엔 브로맨스와 걸크러쉬가..)

여튼 유쾌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한국 곳곳을 수현과 함께 놀고 있는 에즈라 밀러의 소식과 함께 대만 동성혼 법제화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도 들려왔는데요. 이미 헌법재판소에서 결혼을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한정하는 현행 민법이 평등권과 자유롭게 결혼할 권리를 위배한다며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온 상황이었죠. 기존 민법에서 결혼을 이렇게 한계 짓는것을 찬성하는가에 찬성 69.5%,  반대 26.4%. 동거 동성 커플의 권리를 보호하되 민법을 개정해서는 안된다는데 찬성한다에 찬성 58.1%, 반대 37.0%. 동성 커플에게 민법에 정의된 부부의 권리를 동등하게 보장하는데 찬성하는가에 찬성 31.0%, 반대 63.5%.

이쯤에서 물 한잔 마시고, 긴 호흡 한번 하게 되긴 합니다. 덕분에 대체 너네가 무슨 억압을 받고 있단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되묻고 싶어집니다. 당신의 반려자와 당신의 관계가 다수의 투표로 보호받을만한 관계인지 판단받아야 하는 상황에 대해 무슨 생각이 들지 그리고 그 시도조차 무너졌을때 어떤 기분이 들지.. (잠깐 감성팔이 해봅니다만 뭐 크게 기댄 안합니다)

저는 동성애자들의 법제혼 요구가 정의라고 주장하진 않겠습니다. 정의나 상식같은건 사람들에 따라 너무 다르게 규정되니까요. 하지만 분명히 인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최대한의 행복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고, 커뮤니티에 실제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이 기조는 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커뮤니티에 기여하게 하고, 지원하게 만들어왔죠. 이런 맥락으로 동성혼 법제화는 소수자로 불리는 이들의 사회 기여도를 높이고, 이종간의 결합과 시너지로 혁신을 이끌어내는 건강한 사회를 작동시키는데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지금 해맑은 표정으로 김치를 입에 문채 유쾌하게 웃으며 스스로를 논바이너리로 칭하는 인류가 돌아다니는 무려 21세기에, 뭐든 새로운건 부담스럽다고 느끼는 이들이 당장은 많아보여도 진화의 방식이 늘 그래왔듯 어느순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낼거란 말을 좀 길고 진지하게 해봤습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일조량이 모자란 쉽게 우울해지기 쉬운 이 겨울, 비타민D도 챙겨먹으며 잘 먹고, 잘 자며 새로운 시간이 오길 기원해 봅니다. 에즈라 밀러의 토끼머리띠와 비타민D에 치어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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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P.3 “고독의 힘” 

 

고독이란 단어는 대부분 씁쓸한 기분을 들게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노력하죠. 사람들과 원만히 지내기 위해 관심없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척하고, 웃기지 않아도 종종 큰 소리로 웃고 TV예능에서 배운 리액션도 해봅니다. 하지만 그런 영혼없는 피드백을 잔뜩 하고 집에 돌아온 날엔 뭔가 씁쓸하기 마련이죠.

이런 고민은 지금 시대의 것만은 아닌듯 합니다. 20세기 초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에서 이런 답장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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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멀어져간다고 하셨는데, 그건 당신의 세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아무와도 함께 갈 수 없는 당신의 성장을 기뻐하십시오. 자연속에 있는 모든 것은 저항하고 자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독자적인 것이 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고독하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순간적으로 삐딱하게 젊은 시인이 꼰대 아냐? 란 생각도 들었지만.. 흠흠;; 다시 고독력에 집중해서.. 비단 성적 지향성만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는 퍼스널리티를, 끊임없이 훼손시켜가며 영혼없는 대화로 점철된 관계를 이어가는건 외롭지 않으려는 노력이겠죠.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대화들이 더 외로워지게 만든다는걸 알게됩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혹은 조금의 결심을 얹어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는 관계를 계발하고 맺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데요.

바로 이 순간 고독력이 진가를 드러냅니다. 타인에게 반사 혹은 투사된 자신이 아닌 자기 자신안에 온전히 웅크려있던 자기를 봄으로써 더욱 의미있는 관계를 맺을수 있는 나를 준비하게 해주니까요.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하면 인내력이나 지구력처럼 고독력을 기를 수 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나도 모르게 받아버린 여러 영향들에 대해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충분히 필터링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는게 첫번째 일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시공간을 확보해 나만의 공기청정기를 돌린달까. 특히 나쁜 자극의 경우 원망이나 분노에 취해 균형감을 잃지 않으려면 더더욱이요.

(여기서 잠깐. 나쁜 자극을 준 사람 탓은 일단 해야합니다. 오십보 백보같은, 분명 더 큰 잘못을 한 가해자를 두둔하고 죄를 경감시키는 표현은 무찔러야하고요 불끈-)

그 외도 단순하지만 오후의 고요속에서 마시는 차 한잔 같은?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 고독력을 기르려는 노력도, 연습도 쌓여갈텐데요. 그로인해 어느 날은, 오늘보다는 조금 더, 혼자라도 혹은 여럿이라도 두렵지 않은 시기가 오길 기대해봅니다.

 

P. S : BGM으로 하나 쓰윽-  <그런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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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P.2 “버틴다는 것에 관하여”

얼마전 트위터에서 ‘#제1회_여성최애_자랑전’이란 태그가 한참 돌았는데요. 영화 ‘헝거게임’의 여주인공 캣니스도 있길래 저도 좋아요를 눌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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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용을 잠깐 설명하자면 캣니스는 여동생 대신 일종의 배틀그라운드에 뽑혀 자신과 비슷한 이유로 출전한 가난한 동네 출전자들과 마지막으로 살아남는 사람이 우승하는 게임에 출전하게 됩니다. 이 살육전을 기획하는건 각 구역의 가난한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지배계급이고요. 한마디로 니들끼리 싸우고, 분노하고, 죽이고 살아남으라는건데요. 하지만 캣니스는 결국 배틀그라운드 안에서 우승이 아닌 연대를 선택하고 경기시스템을 파괴하는 활을 날리며 시스템을 거부하는 이들의 상징이 됩니다. 좀 뻔하긴 합니다만 캣니스를 연기한 제니퍼 로렌스의 미모와 카리스마는 결코 뻔하지 않던;;; (흑흑)

제가 캣니스에게 끌린건 그가 원치않는 경기장에 등떠밀려 들어왔지만 도망치지 않고 결국 버텨냈기 때문입니다. 물론 캣니스는 버티는 것 이상의 것을 보여줬지만요. 어릴땐 떠나는 사람이 멋져보였지만 지금은 남아서 어떻게든 버티는 사람이 멋져보인달까. 그리고 그렇게 가끔은 버티는 것만으로도 눈에 보이는 존재가 되고, 신경쓰이는 존재가 되고, 그런 이들이 모여 ‘세력’이 되는건 무척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작은 버팀들이 쌓여 일부의 극단적인 종교론자들이 아닌,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우리를 인식하고, 언급하고, 신경쓰는 날들이 왔을때 스스로 당황해 다시 숨지 않도록 연습도 해야겠고요.

앞선 글에서도 언급한 페트라 켈리가 여성문제에 있어 한말 중 이런 말도 있죠.

“진정으로 새로운 여성이 태어나려면 그에 어울리는 새로운 남성이 태어나야 합니다.”

자존감이 사라진 빈곤한 영혼에 기계적이고 폭력적인 교리를 채운채 증오를 휘두르는 광신도들이 아닌, 평범한 회사동료나 친구들이 우리의 진정한 소통 대상이 되야합니다. 그렇지만 그들과 이야기할때 갑자기 돌출된 동성애 이슈에 놀라 얼버무리거나 의도치않게 포비아 흉내를 내며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다시 덮어버리게 되는 경우, 속상하죠.(feat. 한밤의 이불킥) 하지만 나의 의견이든 존재든 모든 드러내는것은 에너지와 연습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부디 오늘 하루도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시길, 어쩔수 없이 가끔은 지더라도 버틸만큼은 종종 이기며 그 에너지와 연습할 기간을 확보할 수 있길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