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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정치

성소수자의 벗 – 노회찬, 그를 추모한다.

 

노회찬(빈소)

그는 생전에 ‘일반이 아닌 이반(성소수자)과 연대하는 비성소수자로써 자신을 삼반’ 이라고 표현했다.  촌철살인을 구사하는 구력 높은 정치가로서 정말 많은 어록을 남긴 바 있다.

그는 트랜스젠더가 호적상 법적으로 지정된 성별을 정정할 수 있도록 2006년 10월 ‘성전환자의 성별변경 등에 대한 특별법안’을 대표발의했다. 2008년 1월에는 차별 사유에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포함한 차별금지법을 대표발의했다. 노 의원은 2007년 12월 성소수자 단체 ‘친구사이’가 수여하는 무지개 인권상을 받았다. 그는 초선 시절부터 소수자 인권을 지킨다는 원칙은 흔들림 없이 지켜왔다. 3선 정도 되는 정치인이라면,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다수를 지향할 수도 있건만 그의 목표는 그것이 아니었다. 더 높은 곳에 홀로 서기 보다는 우리와 함께 서기를 바랬다. 그의 삶이 그것을 말해준다.

요즘 정의당의 지지율이 매주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헌법 개정으로 소선거구제도가 바뀌면 국민의 지지가 정당하게 국회에 반영되어 정의당이 지금의 지지율로(10%~12%) 30석은 확보할 수 있을 수 있다. 그런 정의당의 발전에 노회찬 의원은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았을까. 자신은 멈추지만 당은 계속 진보해야 한다는 그의 유언이 생각나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의 유언처럼. 우리는 더 나은 정의로운 세상을 위하여 뚜벅뚜벅 진보해야 한다. 그가 지었던 짐을 나눠 멜 수 있는 정치인을 키우고, 후원하고, 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울적한 오늘밤. 우리의 친구 삼반 노회찬 의원. 그를 기억한다. 

우리를 위해 대폭발 해주던 그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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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 사회, 경제 성소수자

혐오의 자유, 혐오 표현의 자유는 권리인가?

밑에 혐오할 권리에 대한 댓글이 달려서 이것저것 고민해봤다.

그런데 일단 혐오할 ‘권리’보다는 ‘자유’라는 용어가 더 적절할 듯하다. ‘권리’란 법(法) 중심 개념이며 특별한 이익을 누릴수 있는 법률 상의 힘을 가리키니까 혐오할 권리라는 단어는 적절치 않다.

○ 타자를(대상을 인간으로 한정 한다.) 혐오할 자유가 개인에게 있는가?

타자를 혐오할 자유가 있는가? 내 마음에서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히 내 자유다. 그 개개인에게 자유가 있다. 너를 혐오할 자유가 나에겐 있다.

○ 그럼 너를 싫어하는 내 혐오 심리를 표현할 자유가 나에게 있는가?  이는 권리로써 법적으로 보호 받아야 하는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나 혼자 생각하고 나혼자 살아가지 않는다. 해서, 내가 너를 싫어할  수는 있는데 이것을 타자에게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레미 월드론’의 <혐오표현, 자유는 어떻게 해악이 되는가>라는 책이 당신의 혜안을 넓혀 줄 것이다.

책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혐오 표현의 해악에 주목하면 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자유주의에서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 한 자유가 우선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즉 자유도 해악이 있는 경우에는 국가 개입이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혐오 표현의 해악을 입증함으로써 혐오표현금지법의 정당성을 입증한다.

혐오 표현의 해악은 공공선을 파괴하는 것에 있다. 여기서 공공선은 개인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존의 조건을 말한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각기 다른 속성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보장, 최소한 서로를 적대하거나, 배제하거나 차별하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동의가 필요하다.

혐오 표현이 난무하는 환경을 그대로 볼것인가, 아니면 혐오표현이 없는 환경을 구축할 것인가 두가지 선택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지 살피면서 각 개인의 존엄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혐오 표현을 법적으로 제재하는 이유는 “모욕, 불쾌감, 상처를 주는 말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보다는, “포용의 공공선과정의의 기초에 관한 상호 확신의 공공선”을 지키는 것에 있다.

○ 혐오할 권리를 보장하기 보다는 혐오표현 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

혐오표현금지국가

사람이 타고난 것에 대한 것은 부끄러움의 대상도 아니고, 혐오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인종, 성적지향, 장애 등을 이유로 혐오의 대상으로써 표현되어 지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키고, ‘혐오 표현’이 개개인 ‘인성’의 됨됨이의 척도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다.

나는 네가 유대인이어서 싫어. 나는 네가 동성애자라서 싫어.

나는 네가 흑인이어서 싫어. 나는 네가 중국인이라서 싫어. 나는 네가 그냥 싫어.

이런말을 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